겸손해지고 싶다는 마음과,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 사이에서
오늘 저녁 지인과 술자리를 가졌다.
오랜만에 지인이 연락을 주어 서로의 근황을 묻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누가 요즘 무엇을 하고 사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던 대화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진지해졌다. 경제 이야기, , 자동차 이야기, 요즘의 젊은 세대 이야기, 인공지능 이야기까지 주제가 계속 바뀌었다.
나는 아는 것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말을 보탰다. 처음에는 한두 마디였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설명이 길어졌고, 어느 순간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 내가 아는 것을 말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술기운이 조금 남은 채 혼자 걷다가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빵장수 야곱』이라는 책이었다.
아마 스무 살 무렵 읽었던 것 같다. 내용 대부분은 이제 희미하다. 인물도, 이야기의 순서도, 정확한 문장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수많은 내용 가운데 이상하게도 한 장면만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정확한 원문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 기억 속에는 대략 이런 내용으로 남아 있다.
나는 높은 언덕에서 세상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지식과 확신이라는 벽돌을 쌓았다.
그러나 벽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
더 넓은 세상을 보려면 지식을 더 쌓는 것만큼이나, 내가 쌓은 벽을 허무는 일도 필요했다.
그리고 그 벽을 허물고 난 뒤에도, 한때 쌓았던 벽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허물어진 채 발아래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지식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나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게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세상을 보고 있었을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지식이라는 벽돌을 쌓는다.
학교에서 배운 것, 책에서 읽은 것, 일을 하며 익힌 것, 실패하면서 깨달은 것,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들이 하나씩 쌓인다. 젊을 때는 벽돌이 많지 않다.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고, 모른다는 사실조차 잘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생긴다.
어떤 사람은 믿어도 되고, 어떤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돈은 어떻게 벌고 어떻게 잃는지, 몸은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회복되는지, 관계는 어디에서 틀어지고 어디에서 회복되는지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렇게 쌓인 지식과 경험은 우리를 보호한다.
한 번 속았던 일을 다시 당하지 않게 하고, 위험한 선택을 피하게 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식은 분명 필요하다. 경험도 필요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겸손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문제는 벽돌이 쌓이기 시작할 때가 아니다.
그 벽돌로 벽을 만들기 시작할 때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순간, 지식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세상을 가리는 벽이 된다.
나는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오래 살았고, 더 많이 경험했으며, 비슷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한다.
“그건 원래 그런 거야.”
“내가 해봐서 알아.”
“사람은 쉽게 안 변해.”
“요즘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
“결국 돈이 문제야.”
이런 말들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그 말 뒤에 더 이상 질문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쌓은 벽에 난 작은 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은 틈으로 보이는 풍경을 세상 전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말도 많아졌다
오늘 술자리에서도 그랬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람은 자기 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답을 듣고 싶었다기보다, 그동안 힘들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곧바로 내가 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해.”
“내가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어봤는데.”
“그건 사실 이렇게 보면 돼.”
말을 할 때는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알려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정말 내 조언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계기로 내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결론을 내렸고, 충분히 묻기도 전에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 사람의 사정은 내가 겪은 일과 다를 수도 있는데, 나는 내가 아는 작은 경험을 기준으로 그의 문제를 설명했다.
그 순간 내 지식은 도움이 아니라 벽이었을 것이다.
나를 상대보다 높은 곳에 세우는 벽,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벽,
상대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벽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말을 아끼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아는 이야기가 나오면 말하고 싶어진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진다.
조금이라도 틀린 이야기를 들으면 고쳐주고 싶고, 내가 경험한 일과 다르게 말하면 설명해 주고 싶어진다.
나는 그것이 친절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당신보다 조금 더 경험했다.”
“내 말도 들어볼 만하다.”
겸손하지 못한 말의 밑바닥에는 종종 이런 마음이 숨어 있다.
겸손은 자신을 작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겸손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앞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것을 겸손이라고 여길 때가 많다.
하지만 진짜 겸손은 자신을 작게 만드는 일이 아닐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일에 가깝다.
내가 아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경험이 의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에는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필요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알고 있는 것을 나누고, 잘못된 정보는 바로잡으며, 경험에서 얻은 교훈도 전한다.
다만 자신의 말을 정답처럼 내세우지 않는다.
“내 경험으로는 이랬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이런 문장에는 작은 여백이 있다.
그 여백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온다.
내가 틀릴 가능성도 들어오고, 새로운 경험도 들어오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상도 들어온다.
겸손이란 말을 하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내 말 옆에 다른 사람의 말을 놓아둘 공간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알고도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식의 벽을 쌓으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 다시 벽돌을 쌓았다.
알고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는 이런 일이 많다.
화를 내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화를 낸다.
남과 비교해 봐야 마음만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교한다.
건강을 위해 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룬다.
가까운 사람에게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부로 말한다.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말한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지식은 머리에 쌓이지만, 태도는 반복을 통해 몸에 남는다.
그래서 겸손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저절로 겸손해지는 것은 아니다. 겸손에 대해 좋은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실제로 겸손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겸손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자신의 겸손함을 확신하는 순간, 또 하나의 벽이 생길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겸손하다.”
이 생각만큼 교묘한 벽돌도 없다.
어쩌면 겸손은 한 번 배우면 완성되는 성품이 아니라, 매일 무너뜨려야 하는 작은 벽에 가까울 것이다.
오늘 조금 허물었다고 내일도 허물어진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내 생각과 다른 말을 듣고, 자존심이 건드려질 때마다 벽은 다시 쌓인다.
그러므로 겸손은 상태가 아니라 반복이다.
겸손해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겸손해지려면 거창한 결심보다 작은 습관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더 묻는 것이다.
상대가 고민을 말할 때 곧바로 해결책을 말하기보다 먼저 물어볼 수 있다.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내 생각을 말해도 될까?”
이 짧은 질문 하나가 대화의 방향을 바꾼다.
내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게 하고, 상대의 문제를 내 경험으로 덮어버리지 않게 한다.
두 번째는 자신의 경험에 한계를 붙이는 것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 대신 “내 경우에는 이랬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말은 상대의 경험까지 설명하려 한다.
“내 경우에는 이랬다”는 말은 내 경험을 하나의 사례로 남겨둔다.
세 번째는 모든 대화에서 이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누가 맞는지를 가려야 할 때도 있지만, 많은 대화는 승부가 아니다. 정답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대화가 훨씬 많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채로 헤어져도 된다.
내가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가 잘못 알고 있는 사소한 것을 모두 바로잡지 않아도 된다. 모든 오류를 수정하는 것보다 관계를 편안하게 남겨두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네 번째는 모른다고 말하는 연습이다.
“그건 잘 모르겠어.”
“내가 정확히 아는 내용은 아니야.”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어.”
이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작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는 것을 말할 때도 더 신뢰를 얻는다.
마지막은 하루가 끝날 때 자신의 말을 돌아보는 것이다.
오늘 나는 누구의 말을 끊었는가.
누군가 조언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조언하지 않았는가.
내 경험을 정답처럼 말하지 않았는가.
상대를 이해하려 했는가, 아니면 나를 보여주려 했는가.
이 질문은 자신을 책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벽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벽을 발견해야 벽돌 한 장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다.
허물어진 벽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기억 속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벽을 허문 뒤에도 벽돌이 남아 있었다는 부분이다.
그 벽돌들은 버려지지 않았다.
한때 나를 가두었던 지식과 경험도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발아래 놓여 있었고, 필요하면 다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다만 이제는 벽이 아니었다.
나는 이 장면이 참 좋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 쌓아온 경험을 모두 내려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을 가지고 있되, 그것으로 남을 가두지 않는 것이다.
내 경험을 간직하되, 다른 사람의 경험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는 것이다. 지식을 발아래 디디고 더 멀리 바라보되, 그것을 다시 높게 쌓아 시야를 막지 않는 것이다.
벽돌은 여전히 필요하다.
집을 지을 수도 있고, 길을 만들 수도 있으며, 누군가 앉아 쉴 작은 자리를 만들 수도 있다.
같은 지식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벽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에 남은 마음
오늘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왜 그렇게 말을 많이 했을까.
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듣지 못했을까.
왜 내가 아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었을까.
하지만 지나간 말을 계속 후회하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의 부끄러움을 내일의 벽돌로 쌓지 않으면 된다.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야.”
“나는 겸손하지 못해.”
“사람은 잘 변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도 또 다른 벽이 될 수 있다.
대신 다음 만남에서 한 번만 더 참아보려 한다.
내가 말을 시작하고 싶을 때 상대에게 질문 하나를 더 해보고, 아는 내용을 설명하고 싶을 때 한 문장만 덜 말해보려 한다.
누군가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해도 바로 고치려 하지 않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들어보려 한다.
겸손은 갑자기 조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말하고 싶은 순간에 한 번 더 듣는 것,
가르치고 싶은 순간에 한 번 더 묻는 것,
확신하는 순간에 작은 의심을 남겨두는 것.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쌓여 사람을 바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 무렵 읽었던 책의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렸다. 하지만 지식의 벽돌과 높은 벽에 관한 장면은 오랫동안 남아 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해한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해는 머리에 남는 것이고, 깨달음은 삶에서 반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벽을 쌓는다.
오늘도 쌓았고, 아마 내일도 쌓을 것이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가끔 그 벽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벽을 알아본 날에는 벽돌 한 장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다.
겸손이란 완성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쌓은 벽을 매일 조금씩 알아차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더 많이 알기 위해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도 있다.
오늘 돌아오는 길에 오래전 그 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 것은, 아마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벽돌 하나를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